
September 11, 2025

찰리 커크 암살 사건에 대한 네 가지 성찰
미국 사회는 보수 정치 운동가 찰리 커크가 암살범의 총격으로 숨졌다는 소식에 여전히 충격 속에 휩싸여 있다. 사건은 수요일 오후(현지시각) 유타밸리대학교에서 열린 한 행사 중 발생했다. 당시 커크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하던 중이었으며, 정체불명의 괴한이 총격을 가했다.
커크는 끝까지 ‘생각의 자유로운 교류’라는 가치를 믿었다. 이는 분열된 언론 지형 속에서 점점 희귀해진 가치였다. 커크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 대학 캠퍼스에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진보 세력이 ‘자신들의 텃밭’으로 여겨온 공간에서도 공개적으로 맞섰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 커크는 능숙하게 대응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범인이 아직 붙잡히지 않아 범행 동기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건 정황은 총기 훈련을 받은 인물에 의한 계획적 암살 가능성을 시사한다. 범인은 단 한 발의 총탄으로 커크의 목을 관통시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수사 당국은 약 200야드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커크가 능동적인 정치적 인물이었던 점과 사생활에서 별다른 분쟁이 드러나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개인적 원한보다는 정치적 동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구체적 동기를 규명하기에는 아직 시점이 이르다는 평가도 있다.
캠퍼스 좌파, 진실을 혐오하다
우선 커크가 왜 논란의 중심 인물이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커크는 태아의 생명, 성별과 성적 정체성,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현안에 대해 ‘진실’을 말했다. 커크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청중 앞에서만이 아니라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커크는 진실을 공개적인 토론의 장에 세워 두고 그 정당성이 모든 이에게 드러나도록 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Prove me wrong )”는 커크의 초대장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좌파 진영을 자극했다. 커크는 보수적 사상을 ‘지적 고립지대’에 가두지 않고, 좌파 진영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공적 공간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좌파는 대학을 더 이상 계몽의 전당이 아니라 불편한 생각으로부터 차단된 안전지대 즉 ‘충격 없는 고무로 만들어진 방’으로 재구성했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서는 '커크를 캠퍼스에서 추방하라'라는 청원이 제기되어 약 1천 명의 서명을 모으기도 했다.
다시 말해 좌파가 지배하는 대학은 성경 욥기 38장 2절의 표현대로 “지식 없는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한다.”라는 대학이었다. 이들은 타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아예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빈약한 사상을 보존하려 했다. 예수는 이러한 태도가 도덕적 차원의 문제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며, 그 행위를 드러내지 않으려 빛으로 나오지 않는다”(요한복음 3장 19~20절).
커크의 화법이나 어조에는 문제 제기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적대시된 궁극적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사람들이 커크를 미워한 것은 그가 말한 보수적 진실 그 자체 때문이었고, 또 그 진실을 사람들이 외면할 수 없는 공간에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지난여름, 미국 정치 전문 매체 Axios는 민주당 지지층 내부에서 고조되는 불만을 보도했다. 양원에서 소수파가 된 민주당 지도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전달된 메시지는 분명했다. 민주당 지지층은 과격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대응을 원했다는 것이다. 한 민주당 하원의원은 익명으로 “우리 지지층은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끌려면 피가 흘러야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의원은 “어떤 이들은 ‘정말 필요한 건 총에 맞을 각오’라는 말까지 한다”고 덧붙였다.
좌파 급진주의자들은 폭력을 갈망했고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폭력이 현실로 나타났다 . 물론 이번 희생자가 그들 자신의 의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라는 우상을 위해 인간 희생을 요구해온 이들은 첫 희생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최근 미국 정치사에는 암살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과정에서 두 차례 암살을 피했는데, 한 번은 총알이 귓불을 스치고 곁에 있던 시민이 사망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시 샤피로(민주당) 주지사와 가족이 관저에 머무는 중에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관저가 화염병 공격을 받았다. 2022년에는 한 괴한이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자택 앞에서 체포됐으며, 2017년에는 공화당 하원의원 스티브 스칼리스가 총에 맞았다. 2011년에는 민주당 의원 개비 기퍼즈가 총격을 당했다.
이제 좌파 급진주의자들이 첫 피를 흘리게 한 이상 이번 커크 암살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어 떼가 피를 맛보면 광분하듯 이들의 욕망은 더욱 자극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의 노예”(디도서 3장 3절)로 사는 자들이 그 파괴적 충동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에 근거한다. 만약 이러한 진술이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무정하게 들린다면 독자에게 상기시킬 수 있는 말은 커크 자신이 늘 했던 말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Prove me wrong )”
현실은 분명하다. 미국 좌파 정치세력은 폭력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상당수 좌파 인사들은 타인의 존엄을 경시하고, 폭력을 정치적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역설적이게도, 커크가 총탄에 쓰러진 바로 그 순간에도 커크는 좌파의 폭력 문제, 특히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주장하는 범인들에 의한 총격 사건의 증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물론 일부 극우 인사들 또한 폭력에 열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들이 지닌 특수한 문제점은 이들은 내부에서 일어난 폭력을 인정하거나 규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해결 또한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다행히도 일부 진보 인사들은 커크의 암살을 비난했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국방장관 로이드 오스틴은 미군 내 극단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한 전군 차원의 조사를 시작했지만 그 초점은 좁게 ‘우익 극단주의’에만 맞춰졌다. 그 결과 2024년 현역 공군 병사가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현역 해병대원이 집단 총격을 모의하다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치적 폭력은 그 성향이 무엇이든 공화국의 근간을 위협한다. 미국은 1797년 조지 워싱턴이 존 애덤스에게 권력을 이양한 이래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평화적 권력 교체는 국민 주권에 대한 공통된 충성과 총탄이 아니라 투표용지로 승부를 겨루겠다는 정당 간 합의 위에서 성립한다. 선거에서 패배한 자들이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어야만 사회계약은 유지 된다. 만약 폭력에 의존한다면 이러한 기대는 사라진다. 모든 정치적 시도는 설득과 국민의 선택에 기초하는 것이기에 암살이라는 문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위기는 비겁함이 아닌 확신을 요구한다
찰리 커크의 죽음은 미국인들을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세웠다. ‘커크의 용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신념을 가지고 일어나 악의와 비방, 허위 논리에 맞서도록 고무할 것인가? 아니면 암살자의 총탄이 그들을 위축시켜 자기검열에 빠지게 하고, 오직 동조자들 앞에서만 의견을 나누게 만들 것인가?’
찰리 커크의 죽음은 정치적 분열로 깊이 찢긴 미국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낸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이유로 살인까지 불사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분노와 당파적 적개심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대응이 아닌 전혀 다른 정신과 원칙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줬다. 이 정신과 원칙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금 미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망. 곧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이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에베소서 2:14-15)는 복음을 지니고 있다. 커크 자신도 이 희망을 나누었으며 지난 토요일 그는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셨으니 당신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트윗을 남겼다.
찰리 커크의 죽음은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강한 대응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가까운 동지가 잇따라 암살 위기를 겪은 직후 희생된 만큼 트럼프 대통령은 충성심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의 행정부는 대학들이 정치적 폭력을 용인하는 문제에 대해 충돌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단지 정치적 대응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정치적 폭력은 도덕적 공백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 공백을 채울 수 있다. 교회는 이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에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커크는 용감했을 뿐 아니라 행복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명령받은 이유는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사람들의 죄된 쾌락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그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충만한 삶을 함께 소유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커크가 좌파 급진주의의 온상으로 들어가 가감 없는 진리를 전했던 이유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무의미하게 파티하며 허무 속으로 빠져드는 일을 그만두라. 유산을 남기고, 용감해져라.” 커크는 7월 27일 이렇게 트윗을 남겼다. 함께 첨부된 영상은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폭스뉴스 Fox & Friends 인터뷰를 마친 직후 세 살배기 딸이 세트를 가로질러 달려와 그의 품에 뛰어든 장면이었다.
딸이 태어난 이후 커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내려다보는 순간,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내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분명해진다.”
커크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아내를 사랑했고, 자녀들을 사랑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사랑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삶에 목적과 명료함, 충만함을 부여했다. 커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았고 그 섭리 속에서 축복을 발견했다. 자신을 증오했던 좌파들이 과연 그만큼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은 미움에 가득 차 하나님의 선한 은사를 누릴 여유조차 잃었던 것일까? 혹은 커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행복했기 때문에 그를 미워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제 이들의 증오는 더 이상 커크에게 닿을 수 없다. 커크는 단 한 발의 총탄으로 서른한 살의 이른 나이에 구원자의 품으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커크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가족에게는 파괴적인 비극이다. 커크는 아직 젊은 아내와 어린 두 자녀(세 살과 한 살)를 남기고 떠났다. 단 한 발의 암살자의 총탄이 이 행복한 가정을 영원히 찢어놓았고 남은 자들은 그 슬픔을 감당해야 한다.
이제 교회는 먼저 자기 식구들을 돌봄으로써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찰리의 아내 에리카와 두 어린 자녀를 위해 기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