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된 미국 보수주의 운동가 찰리 커크와 그가 한국에 주는 메시지
- 조평세
- 9월 22일
- 5분 분량
⊙ 18세 때 ‘터닝포인트USA’ 설립… 극우 아니라, 좌파인 상대방도 존중하며 이성적 토론
⊙ “미국의 명분에 함께 싸울 한국 국민이 남아 있는 한,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분과 함께 싸울 것”
⊙ “악을 행하고 자유를 파괴하려는 이들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굳게 서있어야”
⊙ “한국 정부의 목사 압수수색·구속은 끔찍한 일… 트럼프 대통령은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젊은 보수주의자들의 아이콘이었던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지난 9월 10일(현지시간) 미국 유타밸리대 캠퍼스에서 행사 도중 극좌(極左) 저격범에 의해 암살당했다. 3000여 명의 관중 가운데는 그의 아내 에리카와 만 3세, 1세 된 두 아이도 함께 있었다. 1993년생인 커크는 32번째 생일을 불과 나흘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청년 단체인 ‘터닝포인트USA’의 설립자이자 대표였다. 그리고 미국 보수 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역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운동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두 번(2016년, 2024년)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커크는 죽음을 맞기 불과 닷새 전, 한국을 처음 방문해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빌드업코리아(Build Up Korea·대표 김민아)’ 행사의 주(主) 연사로 참여했다. 아시아 첫 데뷔 무대였던 한국에서 그는 한국의 위대함과 신성한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약 1500명의 한국 젊은이들에게 “좌익 거짓에 맞서 용기를 내어 진리를 말할 것” “결혼하고 아이를 많이 낳을 것” 등 보수주의적 가치를 역설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커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 관공서에 일주일간 조기(弔旗) 게양을 명령하고, 민간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대통령상인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그에게 추서(追敍)하겠다고 발표했다. 커크가 정치 참여를 적극 조언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러닝메이트가 되도록 도와준 J. D. 밴스 부통령은 자신의 전용기 에어포스2로 커크의 시신이 담긴 관을 유타에서 애리조나까지 싣고 와서 미군 의장대와 함께 운구(運柩)했다.
커크와의 만남

필자는 2019년 2월말 미국 보수행동 컨퍼런스(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CPAC)에서 커크를 처음 만났다. 필자는 CPAC의 주제별(breakout) 세션에서 고든 창, 로런스 펙 등 아시아 전문가들과 함께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급진적인 친북(親北) 행태를 고발했다. 하지만 그해 2월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김정은을 만나고 온 직후였고 아직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對北) 협상력에 상당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인지, 사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 현장에서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당시 스치듯 짧은 조우에서 필자는 ‘터닝포인트UK(영국)’ 지부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 ‘터닝포인트KOREA’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필자는 커크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후 커크의 터닝포인트 행사장에 직접 찾아가 그의 주목을 끌고 한국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 결국 지난 9월 5일 킨텍스 행사장까지 인도한 사람은 ‘빌드업코리아’ 김민아 대표였다. 김민아 대표는 ‘터닝포인트USA’의 번쩍이는 파티장 같은 행사 포맷을 그대로 한국에 가져와 2023년부터 매해 빌드업코리아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왔다. 김 대표는 작년 8월경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를 서울 코엑스에 연사로 초대한 데 이어 이번에 찰리 커크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다.
그렇게 성사된 그의 첫 아시아 방문이 마지막 방문이 될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 못 했다. 하지만 김민아 대표를 통해 찰리 커크의 도전적인 보수주의 메시지를 한국 청년들에게도 육성으로 전하게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더 나아가 커크의 방한(訪韓)을 통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젊은 보수주의 운동을 미국 보수 진영에 널리 알리게 된 것도 깊이 감사할 일이다.
한국을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여독을 풀 사이도 없이 나간 ‘아메리칸 컴백 투어(American Comeback Tour)’ 현장에서 커크가 극좌 세력의 표적이 된 것은 무엇보다 그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적(敵)이 그를 잠재울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총알뿐이었던 것이다.
“나의 주장을 반박해 보라”

찰리 커크는 18세이던 2012년, 진보 좌익과 세속주의의 본진(本陣)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가에서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 낮은 세금 등의 보수주의적 가치들을 전파하는 ‘터닝포인트USA’를 창립해 기울어진 대학 캠퍼스에 균형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대학가의 좌파 교수들을 고발하는 웹사이트를 개발했고, 캠퍼스에 ‘대학은 사기다(College is a Scam)’라는 현수막을 걸고 대학의 좌경화(左傾化)와 젊은이들을 빚더미에 몰아넣기만 하는 비효율성, 교육과는 거리가 먼 좌파적 세뇌의 실상을 고발했다. 또한 ‘나의 주장을 반박해 보라(Prove Me Wrong)’라는 텐트를 치고 진보 좌익 진영의 학생들을 초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했다. 미국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를 안다면 이는 실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살해당한 유타밸리대 현장에서도 그는 이 ‘Prove Me Wrong’ 텐트를 치고 학생들의 질문을 반박하는 Q&A 포맷의 이벤트를 열고 있었다.
최근에는 영국의 대표적인 캠퍼스 공론장인 옥스퍼드 유니언과 케임브리지 학생회에서 수백 명의 젊은 지성인들 및 교수들과 홀로 맞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 캠퍼스보다도 더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세계 최고의 두 상아탑에서 그는 누구보다 담대하게 보수주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낙태, 불법 이민, LGBTQ(동성애 및 트랜스젠더주의), 소수우대정책, 비판인종이론, 총기 규제, 진화론, 과학주의 등 보수와 진보 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슈들을 과감하게 내걸고 상대방의 논리들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좌파들의 본진을 뚫고 들어가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고 진실을 투사하는 커크의 대학 캠퍼스 공략은 매우 주효(奏效)한 전략이었다. 그는 가히 초인적인 순발력과 천재성으로 좌파들의 주장들을 분쇄했으며, 이는 움츠리고 있던 캠퍼스 내 젊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결집시켰다. 과거 예일대에서 토론장을 석권하며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대부로 성장한 윌리엄 F. 버클리(William F. Buckley Jr.)가 재치 있는 글과 언변으로 보수주의를 미국 정치의 지적(知的) 본류로 확장시켰다면, 커크는 직설적인 말과 특유의 진지함으로 보수주의를 새로운 MZ세대의 주류(主流) 문화로 우뚝 세워 놓았다.
좌파도 커크의 토론 자세 인정
그는 또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현 X) 등 소셜미디어(SNS)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장악해 나갔고, ‘터닝포인트USA’는 미 전역 수천 개 캠퍼스에 지부를 설립하며 미국 최대의 청년 조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커크의 X 계정은 55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의 팟캐스트 녹취는 하루에만 75만 번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하기도 했다.
‘터닝포인트USA’의 활동 초기에 그의 메시지는 자유시장의 우월성, 큰 정부의 폐해와 비효율성, 미국 헌법의 천재성 등에 주로 집중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점차 서구문명의 기독교적 배경과 유대-기독교 유산의 옹호 등으로 발전했고, 최근에는 기독교 전도자나 변증가의 설교를 방불케 하는 복음주의 설파로 나아갔다. 일각에서 그를 ‘순교자’로 칭하는 이유다. 그는 한국 빌드업코리아 무대에서도 한국 청년들에게 자유민주주주의와 서구 자유문명의 유대기독교적 뿌리를 기억할 것과, 담대하게 목소리를 높여 그 보수주의적 가치관을 옹호할 것을 촉구했다.
국내 대부분의 주류 매체를 포함한 세계 언론은 찰리 커크를 ‘극우(極右) 청년’으로 매도하고, 그의 죽음이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도발적인 발언 탓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찰리 커크는 결코, 그 어떤 형태로도 증오를 부추기거나 혐오를 조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일부 미국 우익 인사들과 달리 커크는 좌파인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려고 시도했으며, 평화로운 상호 존중의 대화를 이어 가려고 노력했다. 온라인상 공개되어 있는 수많은 그의 캠퍼스 현장 영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오히려 그에게 환호성을 지르는 추종자들이 조용히 좌파 학생들의 반박을 들어 보도록 유도했으며, 이성적(理性的)인 토론이 오고가는 한 결코 상대방의 주장을 먼저 묵살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상대를 존중하며 증오를 부추기지 않아”
그가 건전하고 평화로우며 자유롭고 열띤 캠퍼스의 토론 문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심지어 그를 적수로 삼았던 많은 좌파 평론가들조차 공감하는 대목이다. 한 예로, 케임브리지에서 커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화제가 되었던 한 여학생은 커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영상을 찍었다가 극단 좌파 세력들로부터 뭇매를 받고 있다. 이 여학생은 “상대방을 끝까지 존중하며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는 커크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미국인의 총기 소유권을 옹호한 커크가 ‘Prove Me Wrong’이라는 자신의 텐트 안에서 총격으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두고 결국 그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했다고 조롱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는 커크가 왜 총기 소유의 권리를 옹호했는지, 왜 제2조 수정(修正)헌법이 주민의 총기 소지를 보장하는지를, 그리고 미국 사회의 발전사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소리다. 커크는 트럼프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도 총기 소유권을 옹호했으며, ‘총기를 불법으로 악하게 활용하는 살인범들을 저지하고 억제하기 위해서’ 선한 사람들의 총기 소유권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커크의 싸움은 계속된다

찰리 커크의 담대한 신앙 옹호와 그 신념에서 비롯돼 나온 자유의 목소리는 비단 미국뿐이 아닌 한국과 전 세계에 실로 위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그의 짧은 삶으로,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으로까지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 잔혹한 야만과 폭력으로 그를 잠재운 급진 좌파 세력의 조롱 섞인 총알은 찰리 커크 한 사람의 마이크는 떨어뜨렸을지 몰라도, 머지않아 도전받고 깨어나 목소리를 내게 될 수백 수천만 명의 ‘찰리 커크들’과 그들이 쥐게 된 확성기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남겨진 두 어린아이를 홀로 맡게 된, 누구보다 큰 슬픔에 잠긴 젊은 그의 아내 에리카 커크도 남편의 사망 불과 이틀 만에 공식 성명을 통해 이를 공언했다. 자유를 위한 찰리 커크의 목소리는 그가 일으킨 수많은 젊은 보수주의자들과 단체들에 의해 더욱 큰 위엄과 함성으로 지속될 것이며, 신(神)이 선물하고 인류가 역사를 통해 증명한 자유문명은 커크의 죽음 이후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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